보존되지 않는 자기조직화 임계성 모형
에너지가 보존되지 않는 시스템에서 임계성이 나타나는가라는 문제에 관해 재작년에 두 개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모래쌓기 모형과 지진 모형의 차이(2007. 4. 5.)
그해 6월에는 명쾌한 결론이 나지 않은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논문을 찾아 공부한 결과를 정리하여 세미나에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 블로그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던 미겔 무노즈(Miguel A. Munoz) 그룹에서 이 문제에 관한 준 리뷰급 논문을 올 봄에 냈습니다. 아직 저널에 게재된 건 아니고 아카이브에 올라온 걸 보실 수 있습니다: arXiv:0905.1799v2. 제가 재작년 공부하면서 봤던 논문들이 정리되어 있어서 비교적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 논문의 논점을 이해하려면 꼭 봐야할 논문이 하나 더 생겼는데요, 지금 이 글에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프루스너와 젠센(줄여서 PJ로 부를게요.)이 2002년 <유로피직스 레터스(EPL)>에 낸 건데요, "A solvable non-conservative model of Self-Organised Criticality"라는 제목입니다. 이전 글들에서 옌센은 비보존 시스템에서도 SOC가 보인다는 주장을 한 그룹에 속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겠습니다.
무노즈가 논문에서 말한대로 PJ 모형은 지진 모형(earthquake model)과 숲불 모형(forest-fire model; FFM)의 중간쯤에 있습니다. 모형을 보죠. N개의 자리가 있고 각 자리는 n개의 이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존 변수는 α라고 합니다. 각 자리 i에는 에너지 zi라는 값을 갖습니다. 이 값에 따라 각 자리는 '안정(stable)', '불안정(susceptible)', '활성(active)' 상태로 나뉩니다. \[ \begin{aligned} 0\leq z_i < 1-\alpha&:&\ \textrm{stable}\\ 1-\alpha\leq z_i < 1&:&\ \textrm{susceptible}\\ 1\leq z_i&:&\ \textrm{active} \end{aligned} \]
에너지들은 0 이상 1 미만의 랜덤한 값으로 초기화됩니다. 그리고 몰기(driving), 방아쇠 당기기(triggering), 풀기(relaxing)의 과정을 거칩니다.
- 몰기: 1/θ개의 자리를 랜덤하게 골라서 각 자리가 안정하면 그 자리의 에너지를 1-α로 높여서 불안정하게 합니다. 안정하지 않다면 내비둡니다.
- 방아쇠 당기기: 1개의 자리를 랜덤하게 골라서 불안정하면 그 에너지를 1로 높여서 활성 상태로 만듭니다. 안정하다면 '몰기'를 다시 해줍니다. (불안정한 자리가 선택될 때까지 '몰기'를 되풀이합니다.)
- 풀기: 활성 상태인 자리의 에너지(zi)는 이 자리의 이웃들에게 각각 αzi만큼 전달되고 나머지 에너지는 흩어져서 사라집니다. 결과적으로 활성 상태인 자리의 에너지는 0이 됩니다.
활성 자리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풀기'가 되풀이되며 시스템의 방아쇠를 당겨서 완전히 풀어질 때까지를 하나의 사태(avalanche)로 정의합니다. 이 시스템의 총에너지를 보면, '몰기'와 '방아쇠 당기기'에 의해 총에너지가 늘어나다가 '풀기'에서 에너지가 흩어지면서 총에너지가 줄어듭니다. 시간이 충분히 흐르면 에너지가 늘어나는 양과 줄어드는 양이 평균적으로 같아지면서 총에너지가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될 거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즉 다음 조건을 만족시킬 때 그렇게 될 겁니다.
\[(1-n\alpha)\overline{z_{act}} \langle s\rangle=(1/\theta)\frac{\overline{p_{st}}}{\overline{p_c}}(1-\alpha-\overline{z_{st}})+(1-\overline{z_c})\]
아래첨자 act는 '활성', st는 '안정', c는 '불안정'을 뜻합니다. '윗줄'은 평균을 뜻하고요, pst와 pc는 각각 안정한 자리와 불안정한 자리의 밀도입니다. s는 사태의 크기이며 꺽쇠는 사태 크기의 평균을 뜻합니다. 위 좌변은 '풀기'에 의해 에너지가 줄어드는 양이며 우변의 첫째항은 '몰기'에 의해 에너지가 늘어나는 양, 둘째항은 '방아쇠 당기기'에 의해 에너지가 늘어나는 양입니다.
여기서 1/θ라는 변수가 발산한다면 우변이 발산하므로 좌변도 발산해야 하고 그건 사태 크기의 평균이 발산한다는 걸 뜻하는데요, 이는 곧 '임계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보존되지 않는 모형에서도 임계성이 나타날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1/θ가 발산해야 한다는 조건은 특정 변수를 미세조정해야 한다는 말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자기조직화'는 아닙니다.
그럼 이 모형이 왜 숲불 모형과 연관되는지만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숲불 모형에서 격자 위의 각 자리는 비어 있음(E), 나무 있음(T), 불이 남(F) 중 하나의 상태를 가질 수 있습니다. 빈 자리에 p의 확률로 나무가 자라고, 나무가 있는 자리에 f의 확률로 불이 납니다. 한 자리에서 불이 나면 '즉각' 이웃한 자리의 나무로 불이 옮겨붙습니다. 불이 난 자리는 빈 자리가 됩니다. 더이상 이웃한 나무가 없을 때까지 불이 번지다가 멈춥니다. 그리고 또 빈 자리에 나무가 자라고 또 나무에는 불이 붙고 퍼지기를 되풀이합니다.
p나 f나 둘 중 하나가 0이라면 나무가 모두 타버리거나 불이 전혀 나지 않거나겠죠. 임계상태가 되려면 둘 다 0보다는 커야 합니다. 그런데 p와 f가 모두 유한하다면, 나무가 매우 빨리 자랄테고 또 화재도 빈번히 일어나므로 나무가 덩어리로 생겼다 덩어리로 없어지는 활동적인 상태가 될 겁니다. 그래서 임계상태가 되려면 두 변수 모두 0에 매우 가까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빈 자리에 나무가 생기는 속도보다 화재가 나타나는 속도가 매우 작아야만 다양한 규모의 화재가 일어날 수 있고 그게 화재 크기의 거듭제곱 분포의 원인이 되어 임계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임계점은 p/f가 무한대인 경우이고, 위 PJ 모형에서 p/f = 1/θ입니다.
PJ 모형에서 α가 0으로 가는 극한은 숲불 모형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때, 안정 상태 = 빈 자리, 불안정 상태 = 나무가 있는 자리, 활성 상태 = 불 붙은 자리라는 대응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α가 1/n으로 가는 극한은 에너지가 보존되는 경우이며 모래더미 모형 중 장 모형(Zhang model)과 비슷해집니다. '몰기'와 '방아쇠 당기기' 규칙이 장 모형과는 다른데 이 차이가 거시적인 현상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모르겠습니다. 끝.